세계와 친구
2011.04.16-04.17
오늘의 남산타워는 붉다.
주말의 야경은 또 다른 느낌이다. 조금은 소란스럽다. 다시 온 이유는 주중에 못 본 아랫 세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보기 위함이었다. 위에서는 안보이던 물결이 아래로 내려가니 보였다. 연어들이 거슬러 올라가는물결의 흐름은 아래에서야 보였고 알고 보니 그 세계는 윗쪽 세계와 너무 다른 세계나환상의 공간이 아닌 다만 낮은 곳에 위치한 장소였을뿐이었다.
'저 아래에 누가 사는지 어렸을 때, 그리고 또 다시 가본 며칠 전 궁금했어.'
그 말에 친구가 답했다.
'내가 살고 있어, 지금도, 우리 집은 거기 있는걸.'
상상이란 아름답지만 때론 무섭다. 이 곳과 저 곳에 벽을 만들기도 하니까. 물결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연어는 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고 그렇게 위와 아래는 갈라진 곳이 아니라 계단을 내려가 다시 언덕으로 올라가니맞물려 돌아가 한세계였음을.다르다고, 무섭다고 여기며 한 발짝도 내딪지 못하거나 '어떤 곳이야' 질문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미지였을 세계를 드디어 오늘에야 만났다.
그리고 옛 기억을 만났다.
종종 보는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을 밤 산책길에 본다. 순간 멈칫한다. 내 슬픔을 등에 같이 져 줄 수 있어요? 정원의 그 말에. 기억이란 대단하다. 쥐스킨트의 단편에선 결국 모두 잊을 것 무엇 때문에 읽느냐 했지만 뇌리에 박혀 버리는 문장도 있는 법이다. 내겐 바로 이 말이 그랬다. 바로 살아 났다. 어딘가 고이 접혀 있다 스르륵 펼쳐지듯, 술술 풀려나왔다. 인디언들은 친구를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 부른다, 들꽃 이야기, 김지수, 문학동네, 어른을 위한 동화 시리즈,... 그래, 친구는 이런 뜻을 지닌 말이었어.
내 아름다운 친구들을 떠올린다. 그 중 또 한 분을 기억한다. 내 친구되신 예수님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주보의 그가 찔림으로 시작하는 이사야서를 읽는다. 성찬식 포도주는 달고 씁쓸하다. 슬픔을 등에 진 맛이다. 뜨겁고 비린 피맛이다. 양날의 검같은 사랑의 맛이다. 이 계절의 자연은 그 사랑을 나타내려는 듯 고우나 처연하고 아름다우나 슬프다. 돋아나는 꽃봉오리에서, 맺혀있는 꽃송이에서, 떨어지는 꽃잎에서 당신의 사랑이 보인다. 온통 당신인데 또 온통 꽃뿐이다. 마치 당신없는 크리스마스 같이.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했던 그 말처럼 눈 있는 자는 보라며 봄세상이 아우성 치나 마음의 눈이 없는 우린 다만 순간이 지나면 잊힐 것들만을 볼뿐이다. 친구는 잊힐 수 없다. 왜냐면 그 등엔 내가 온 존재로 얹혀 있으니까. 그 꽃의 떨어짐은 내 무게 때문이니까. 친구를 생각하는 계절이다, 낙화하는 봄이다. 꽃이신 그 친구 덕에 십자나무에 생명이 피어난다. 다시 개화하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