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청파동 산책
2011.04.14-16
문자가 왔다. 봄날을 만끽하라는 친구의 안부 문자였다.
건물 안에 틀어 박혀서 지하 2층 식당에서 지상 3층 근무처까지만 오르락 내리락 하는 내게 따사로운 봄햇살은 머나먼 세계의 이야기라 아쉬웠다. 그래, 결심했어. 오늘은 일도 그닥 많지 않으니 기필코 일찍 퇴근해 봄날을 온 몸으로 느껴보리라. 그래서 일찍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기쁨을 친구들에게 알렸다. 봄하늘 아래 봄바람이랑 봄꽃이 천지야.
병원 밖으로 나서는 길, 매화가 보였다. 서지에 처음 써서 올린 그 비린내 나는 글이 얘때문에 태어났었지. 어찌 고 딱딱해 보이는 각진 선들에서 둥그런 다섯잎의 꽃들이 오밀조밀 옹송거리고 모여서 하얗게 웃고 있는지. 한 잎 한 잎 떨어져 내린 잎새는 종이비누 같았지. 잠시 지하세계로 몸을 숨길 수 밖에 없는 그 시간들의 봄볕이 아까웠다. 하지만 집에 걸어갈 수는 없잖아. 사실은 길만 알면 걸어가고 싶은 맘이었지만 길치에 체력도 안되는 내겐 무리수.
우리동네, 청파동에 도착했다. 봄볕이 점점 사위어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남은 빛을 누리고자 동네 몇바퀴 산책을 했다. 출퇴근길 말고 저 옆 골목으로 한 번 가볼까. L이 자신이 좋아하는 길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하루연과 슈퍼 사잇길, 대학가라 좀처럼 느끼기 쉽지 않은 진짜 고즈넉한 느낌의 주택가. 어릴 적 빈집 탐방했던 기억으로 골목을 누빈다. 어머, 새로운 밥집이 생겼네. 일본주점스러운 느낌의 나무판자집, 아따마마? 그 옆엔 또 매화 한그루와 화분에 심긴 보라와 핑크 팬지가 살랑이고 있었다. 시간은 벌써 저녁식사 무렵, 산책 끝무렵에 들러야 겠다 싶다. 매화가 보이는 야외 식탁에서 봄바람이랑 얘기하며 밥 먹는 것도 좋잖아? 나지막한 언덕 양옆으로 이 집 저 집 담 너머에 목련도, 개나리도, 이름 모르는 꽃들도 활짝활짝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길엔 온통 파란 청파동 사진관도 있고, 정말 동네 세탁소스러운 곳도 있고, 동물 그림이 문 앞에 그려져 있는 어린이 영어 도서관도 있고, 하늘까지 높은 지붕의 청파 어린이 집도 있었다. 청파다방에서는 커피 볶는 향이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고 흉가 같은 몰골의 어떤 집 앞은 짝 안맞는 조화와 장미 한 송이, 이상한 장식물들이 담벼락 틈새마다 하나씩 꽂혀 있었고 그 건너편 목련나무가 있는 집 앞에는 석조문패에 푸를 청, 물결 파가 한자한자 한자로 박혀있었다. 이 길을 서너번 오르락 내리락 하니 해가 졌다. 청파동이 진짜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봄 날 저녁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무래도 아쉬운 맘에 밤 산책을 한번 더 떠났다. 딸랑거리는 열쇠고리와 핸드폰을 양 주머니에 챙겨넣고 양쪽 귀엔 그날의 노래가 담긴 엠피쓰리 이어폰을 꽂고. 봄날 저녁 산책의 획득물인 새 구두에겐 좋은 구경 시켜준다며 꼬셔서 신고.
우리 앞 집에 라일락이 피어 그 향기가 공기 중에 가득할 때가 밤 마실 가기에 딱 좋은 때다. 아직 라일락은 피지 않았지만 추억의 향기를 떠올리며 청파 초등학교 담이 하늘을 따라 올라가는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길은 말 그대로 청파스러운 길이다. 언덕배기를 천천히 따라가면 푸른 하늘이 서서히 사분의 일, 삼분의 일, 이분의 일이 되면서 바닥에 가까워진다. 하늘이 강림하는 언덕길인 셈. 밤하늘조차 까맣지 않고 멋지게 파란 길.
오르다가 오른쪽 옆 골목으로 빠지면 청파동 최고의 야경이 보인다. 어렸을 적 할머니랑 시장가던 길이기도 하고, 현재 살던 집 이 전의 집이 있던 골목이고, 지금은 재봉틀 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리는, 이전에는 쌀집 앞에서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한창이었던 골목. 최고의 야경 한 켠에 보이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저 아래 지하세계로 가면 위 쪽의 이 세계와는 다른 상상의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았지. 파랗고 빨간 지붕들이 다닥다닥 발 아래로 펼쳐지고 정면에는 하늘을 뒤덮는 마천루, 오른쪽으로 보이는 푸른 빛을 내뿜는 남산타워와 약간 왼편으로 치우친 중앙에는 서울역 광장에 있는 스크린이 펜을 들고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건다. 이개국어를 하는 스크린은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세요? 당신은 아름다운 삶을 어떻게 묘사하시겠습니까? 당신은 살기 위해 일합니까, 일하기 위해 삽니까?' 질문을 쏱아내고 텔레파시로 한 참 스크린과 대화하다보니 남영역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열차가 점점이 불빛을 달고 정면 아래 시선 방향으로 지나간다. 그 사이 스크린은 이야기를 마치고 달을 하나 더 창조해냈다. 두 개의 달 아래서 세상은 조금 더 밝아졌을까. 높은 건물 아래 낮은 지붕의 집들은 할아버지 수염 같은 팔자 모양으로 인자하게 수그리고 있고, 팔자지붕 아래 창문은 따뜻한 불빛을 머금고, 그 옆 노란 가로등은 익은 벼같이 겸손하고 때마침 '언제나'라고 귀 속의 노래는 속삭였다. 눈물이 날 듯 해 다시 집으로 돌아서려고 하는데 이런, 혼자가 아니었다. 뒷편엔 연어들이 한 떼나 지켜보고 있었다. 작년 공공예술론 배우면서 청파동에 공공예술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는 기사를 본적이 있었는데 이 곳에 그 작품들이 있었다. 연어들이 칠보와 유리로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지켜보고 있었다. '사랑합니다'라고 수줍게 고백하는 연어의 말에 응, 고개를 끄덕이며 청파동의 푸른 물결을 그들도 잘 거슬러 올라가길 빌어줬다. 그들과 같은 길을 사박사박 걸으며...구두야, 첫 산책은 어땠니? 이번에도 L이 알려준 청파동 교회 뒷 길로 귀가를 한다. 이 모든 비밀 골목길을 알고 있는 L은 아무래도 진짜 청파동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이 날 찍은 사진은 조금 뒤에 첨부해 보겠습니다. 이제 샤랄라, 봄 꽃놀이겸 책 모임 낭독회 갈 준비를 해야하거든요.
<이상, 생울학적으로 O형이나 문학적으로 A형인 블리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