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일/상-일기♥

두근거렸던 순간, 우리 집에 호두나무가 있었다고?

remlin 2007. 6. 23. 09:36

2007.06.22

1. 이 달엔 기관지 내시경을 주로 하는 방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환자 목록을 뽑아보니 외국인 환자가 떡~하니 있는게 아닌가. '앗, 이런!' 싶었다. 수술실에서는 그다지 대화할 일이 없어서 간단하게 환자 확인만 하면 됐고, 마취과 샘이나 다른 의사 샘들이 있으니 그 분들이 물어볼 건 물어보고 하니 그닥 신경쓸 일이 없는데 내시경 준비실엔 덜렁 나 혼자란 말이다! ㅠㅠ 방에서 내시경 하시는 샘은 '잘 해봐!'란 한 마디만 던지시고, 어쩌라고;;; 혹시나 싶어 병동에 전화해봤는데한국어는 못하시고 영어만 하신단다. 그나마 다른 외국어라면 국제 진료소에서 통역이라도 올텐데; 외국인 환자 응대를 위해 만들어 놓은 문서를 보며 다른 환자 준비하면서도 가슴 떨려하며 흘끗흘끗 보면서 '그래, 별거 아냐.'라며 진정하자고 생각했는데, 환자 옮겨주시는 아저씨가 이 환자분이 병동에서도 주사 맞기 싫다고 난리쳤다는 말을 듣고 '아, 까다롭기까지 해~'라며 긴장 120%

드디어 환자 분이 오시고, 떨려하면서 오히려 환자에게 'Calm down'이라 말 하고, 대략 어찌 어찌 넘어갔는데, 그래도 다행인건, 이 곳에선 순순했다는 사실. 갑자기 뭐라고 물어 보셔서 순간 당황 모드가 됐지만, 몇몇 단어로 유추해 보건데 수면내시경인데 잠은 언제 자냐는 뜻이었던 듯. 안되는 영어 단어 맞춰서 설명하고, 바디 랭귀지 좀 하고. 아아~~ 대인기피증도 있는데, 영어까지 하려니 떨려서 스프레이 하는 약도 떨어뜨리고, 챠트에 똑같은 거 두 번 쓰고 -물론, 환자 분 눈치 못채게 몰래 실수 아닌척 만회했슴~^^v- '굿바이~'라며 떠나보낼 때야 다시 안정. 그러게 램프의 요정에게 내가 빌고 싶은 소원은 모든 사람과 말이 통하는 바벨탑 붕괴 이전의 언어를 내게 허락해 주는 거라니까. ㅠㅠ

2. 저 아래 두 사진에 동그랗게 달려있는 열매가 뭘까요? 꼭 안 익은 감같지 않나요? 잎파리도 감나무 같고. 그런데 저게 글 제목에서도 보다시피 무려 '호두'랍니다. 퇴근해서 대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 현관으로 들어가는데 나무 잎이 계단 위에까지 출렁출렁 파랗게 드리워져 있어서, 엄마에게물었죠. '엄마, 저 나무는 뭐야?''호두나무!'라는 대답을 듣고 놀랐습니다. 우리집에 호두나무가 있었단 말이야 싶어서요. 제가 아무리 현실계에서 좀 떨어져서 이상계와 온라인계에 더 몰두(?)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딛고 서 있는 땅에 관심 좀 가져야겠구나 싶었습니다. 읽고 있는 책인 이승우의 단편집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은 딱 저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_-;

그런데요, 저 파란 열매가 우리가 늘 보던 황토빛의 호두는 아닌 듯 싶어 엄마에게 또 물어봤죠. '근데 저게 모양이 좀 호두같지 않은데...' 어머님 왈, 저 파란 껍질을 까면 안에 평소에 보는 호두가 있다네요. 그걸 또 깨면 먹는 호두알이 나오는 것이고. 복잡하기도 해라. 그런데요, 호두가 저렇게 열린다는 사실 아시는 분 있었나요? 전 처음 알았거든요. 우리집에 호두나무가 있다는 사실도, 호두가 이런 식으로 열린다는 것도. 지식은 갈수록 늘어나고, 알아야 할 것도 많아지고, 전문화 세분화 되어가지만 정말 우리는 알아야 할 것들을 잘 분별해서 습득하고 있는지 싶었습니다. 호두나무를 통해서 내가 알고 있는 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바보와 천재는 종이 한장이란 말처럼. 내게 겸손이란 단어를 알게 해 준 호두나무와 이 나무를 우리 집에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보태기. 그런데요, 이 호두나무 잎만 무성하지, 작년엔 달랑 3알 열렸었다네요.

올해는 어떨런지, 열매가 이것밖에 안보이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