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드래곤 라자 by 이영도
하이텔에서 일궈진 이영도님의 대표작.
정말 열심히 읽었죠. D/R 이어서 F/W(퓨쳐워커)까지.
환타지 속에 녹아든 인간과 삶에 대한 생각들이 넘 좋아요.
믈론 전개와 내용도 좋고 재밌고.
그 시절 한장 한장 엔터를 치며 보던 기억이 나네요.
명 문장을 모아 봤습니다.
제 1 장 : 태양을 향해 달리는 말
-엘프가 숲을 걸으면
"왜 길로 다니지 않는 거지?"
이루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내가 한 말이다. 카알은 대답했다.
"길은 인간의 것이야. 엘프는 길을 만들지 않아."
"길을 안만든다고요?"
카알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옛이야기가 있지. 엘프가 숲을 걸으면 그는 나무가 된다. 인간이 숲을 걸으면 오솔길
이 생긴다. 엘프가 별을 바라보면 그는 별빛이 된다. 인간이 별을 바라보면 별자리가 만들
어진다. 엘프와 인간의 변화를 잘 나타내는 말이지."
제 3 장 : 50명의 꼬마들과 대마법사 펠레일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미는 이루릴
"뱀파이어와 친구가 되기 쉬울까요?"
이루릴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이었군요…."
"예?"
내 얼빠진 대답에 이루릴은 그저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은 친구와 적을 나누는 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죠. 그러나 처음 보는 상대에게는 먼
저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민다고 했지요. 난 그 말에 퍽 감동했어요."
감동…했다고?
"당신은 헬카네스의 율법에 따라 혼란스러운 이 세상을 살기 위해 분명한 선은 가지고 있
지만, 유피넬의 뜻에 따라 먼저 손을 내밀어요. 그것이 아름다워 보였어요. 유피넬과 헬카
네스 양자를 모두 따르는 인간이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우리의 세계는
모두 조화로워서 특별히 친구가 되기 위해 손을 내밀 줄 몰랐죠."
그런가? 난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루릴의 말을 들었다.
"아마 우리가 드워프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우리는 왜 드워프와 관계가
나쁜지 몰랐죠. 하지만 난 알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보고 알았죠. 우리는 친구가 되기 위
해 손을 내밀 줄 몰라요. 우리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몰라요. 그것
이 드워프들에겐 기분 나쁘게 보였던 것 이예요."
이루릴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눈이다.
"그래서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었죠. 먼저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을 배우고 싶었어요. 처음
보는 이 영지의 환자들을 돌보았어요. 그것이 기쁨일 거라고 생각했지요."
이루릴이 이 영지의 사람들을 성심껏 도왔던 이유는 그것인가? 인간의 슬픔이나 고통을
엘프가 공유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이루릴은 내 말에 감동하여 친구가 되기 위해서 먼저
손을 내밀어보았던 것인 모양이다. 인간이었다면, 지금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인간이
었다면 몹시 부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순진한 눈으로 아무런 의혹이나 은유 없이
평범하게 말하고 있는 엘프다. 그래서 나도 완전히 긴장을 풀고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었
다.
"…기쁘지 않았어요?"
이루릴은 미소를 지었다.
"기뻤어요. 그들의 감사하는 표정을 보는 것이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손을 내밀게 됨으로써 예전엔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게 뭐지요?"
"손을 내밀어도 받아주지 않을 때의 슬픔.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어서 뱀파이어에겐 손을
내밀지 않은 것이군요. 난 그것을 배웠어요. 고마워요, 후치. 당신처럼 익숙하게 손을 내밀
줄 알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요…"
제 4 부 : 황소와 마법검
위선(僞善)? 글쎄. 난 위선이라는 개념이 항상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위선의 반대말은
뭐냐? 위악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맹추고, 결국 욕망에 충실하라는 말 정도 되겠지. 그
욕망은 인정하면서, 왜 위선을 부리고 싶은 욕망은 인정하지 못하지? 칭찬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어서 착한 일을 한다면 질색할 것인가? 웃기는 소리. 그럼 칭찬이나 존경은
뭐란 말이냐? 그런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
양떼를 모는 개가 있다. 개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양을 보면 양지기는 저 놈은 성질이
사나운 놈이라고 말하며 싫어하고 잡아먹을 일이 있다면 그 놈부터 고를 것이다. 그리고
개의 인도를 잘 따르면 양지기는 순한 놈이라고 좋아한다. 하지만 그놈은 사실 목장 바깥의
풀맛을 보지 못해 욕구불만일지도 모른다. 똑같지 않나? 한 인간이 오로지 칭찬을 받기
위해 착하게 행동한다. 난 그게 개의 말을 잘 듣는 양과 다른 점을 모르겠다.
제 7 장 : 항구의 소녀
"페어리인 당신은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인간에게 있어 나는 하나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단수형이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원래 다면적이고 여럿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산다는 말이 원래 통하지 않는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당신이 날 사랑하려 한다면, 대왕의 원대한 희망을 함께 수행하는 핸드레이크,
루트에리노의 인간적인 갈등에 같이 가슴 아파하는 핸드레이크, 바이서스군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거는 핸드레이크, 사상 최초로 클래스 10의 마법을 만드려 애쓰는 핸드레이크,
드래곤 로드를 죽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는 핸드레이크, 이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총애를 동시에 받습니다. 원래 불안하죠. 우리는 관계 속에
형성되는 존재입니다. 엘프나 페어리, 드워프들을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부러워한다 해서
우리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제 9 장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드래곤 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나는 질겁했다. 그렇군. 그는 알고있었군. 드래곤 로드는
차갑게 말했다.
"그 간악한 녀석의 말이로군."
드래곤 로드의 목소리의 울림은 스산했다. 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예.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에요. 당신이 아까부터 우리 일행에게 던져온 질문, 아마 당신은
우리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셔서 그렇겠지요. 무례하다고 꾸짖지 않으시겠다면 설명드리겠습
니다. 나는 하나가 아니에요. 따라서 당신은 아까부터 얼빠진, 죄송하지만 이렇게밖에 표현
이 안돼요. 예. 얼빠진 질문을 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가슴이 쾅쾅거리는걸? 다행히도 드래곤 로드는 초장이의 맛이 어떨지 심사숙고하는 표정
은 아니었다. 그는 차분히 말했다.
"나의 실수를 설명해주겠나?"
"당신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눠 놓고는 선택하라고 질문하셨어요."
"나눌 수 없는 것?"
제레인트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네리아는 두손을 곽 쥔 채 날 바
라보고 있었다. 샌슨은 파랗게 질려있었고 이루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카알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어서 질문하셨어요. 당신 보시기에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드래곤 로드께서는 샌슨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지요."
샌슨은 덜커덩하는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그 외에는 심장이 내려앉은사람의 모든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계속 말했다. 손바닥에 땀이 나는걸? 난
슬쩍 그것을 바지에 닦아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으면서 말했다.
"샌슨의 가족들을 죽이겠는가, 샌슨을 죽이겠는가. 조금 달랐을지 몰라도 대충 그런 의미였
지요. 하지만 그건 나눌 수 없어요."
"어째서지?"
"샌슨은 하나가 아니니까. 샌슨은 헬턴트의 경비대장 샌슨이고, 나의 좋은 동료 샌슨이고,
샌슨의 아버지 조이스씨의 사랑하는 장남이에요. 카알의 신뢰받는 길앞잡이고, 그리고 그
아가씨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인 샌슨이에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샌슨이지요. 이런 식의 이
야기도 들어 보셨겠지요? 어쨌든 당신은 샌슨 하나를 살려주는 대신 그 가족들을 죽이겠다
고 말했지만, 그 가족들을 죽이면 샌슨도 죽는 셈이에요."
난 주먹을 꽉 쥔 채 말했다. 이마에 열기가 올라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도저히 말
을 멈출 수가 없다.
"그래요. 그 모든 것이 샌슨이에요. 당신이 헬턴트 영지를 파괴하면 헬턴트 경비대장 샌슨은
죽는 셈이에요. 당신이 날 죽인다면 후치의 동료 샌슨을 죽이는 셈이고요. 당신이 조이스씨
를 죽인다면 조이스씨의 아들인 샌슨은 죽는 셈이에요. 당신이 카알을 죽인다면 카알의 길
앞잡이 샌슨이 죽지요, 그리고, 그리고 그 아가씨를 죽인다면 그 아가씨의 연인인 샌슨을
죽이는 셈이라고요."
"샌슨은 하나가 아닌가?"
난 기가 막혀서 고함을 빽 질러버렸다.
"하나가 아니에요!"
그리곤 곧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계속 다물 수가 없었다.
"영원의 숲, 영원의 숲 아시죠? 거기서는 자신이 자신을 죽이게 되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
지요?"
드래곤 로드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건 안다만, 그것이 이 이야기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 말해주겠나?"
"나가면 그 사람은 사라져버려요! 나라는 존재가 아무리 남아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잊
어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아직까지 그걸 모르세요? 나라는 것은,
나라는 것은 이 몸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구요.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것들에 다
내가 있어요. 그것이라고요! 그 모든 것을 모았을 때 내가 있는 거라구요. 우리는 그렇게 살
아요. 그것이 인간이에요!"
말을 마치고나자 숨이 찼다. 너무 흥분해 버렸나봐. 난 목을 타고 흘러 내리는 땀을 닦아
내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차가운 냉수 한 잔만 준다면 그를 위해 노래 100곡을 바치겠
어. 농담이 아니라고.
드래곤 로드는 침울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랬었군… 그럴 거라고 짐작했지. 이제야 확신을 얻게 되었군."
드래곤 로드는 뭔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감히 끼어들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로군."
- 별은 바라보는 자에게 빛을 준다.
"드래곤 로드는 태양이지."
우리는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카알의 말은 조용히 이어졌
다.
"그는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고, 그리고 그의 빛은 무서울 정도로 세계를 비추지. 그는 만물
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권능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는 바라볼 수 없는 존재이며, 그
빛을 강요하는 존재야. 그는 자신의 빛 때문에 오히려 다른 어둠을 바라보지 못하지. 그는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말했다.
"루트에리노 대왕은?"
카알은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달이지."
"달이오?"
"우리가 어둠을 걸어갈 때 달은우리를 비추지. 그의 빛은 똑바로 바라 볼 수도 있고, 바라보
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 그는 만물을 다스릴 정도로 위해하진 않을지 몰라도, 어둠 속을
걸어가고 하는 사람들에게 조력이 되고 희망이 되는 존재였지."
"…우리는요?"
네리아의 약간 가냘픈 목소리였다. 카알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 말이오?"
"예. 우리, 뭐, 예. 우리요."
"우리는 별이오."
"별?"
"무수히 많고 그래서 어쩌면 보잘 것 없어 보일 수도 있지. 바라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서
로를 잊을 수도 있소. 영원의 숲에서처럼 우리들은 서로를, 자신을 돌보지 않는 한 언제라
도 그 빛을 잊어버리고 존재를 상실할 수도 있는 별들이지."
숲은 거대한 암흑으로 변했고 그 위의 밤하늘은 온통 빛무리들 뿐이었다. 카알의 말은 이어
졌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볼 줄 아오. 밤하늘은 어둡고, 주위는 차가운 암흑뿐이지만, 별
은 바라보는 자에겐 반드시 빛을 주지요.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존재
하는 별빛 같은 존재들이지. 하지만 우리의 빛은 약하지 않소. 서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우
리의 모든 빛을 뿜어내지."
"나 같은 싸구려 도둑도요?"
네리아의 목소리는 슬프지 않았다. 그리고 카알의 대답도 평온했다.
"이제는 아시겠지? 네리아양. 당신들 주위에 우리가 있고, 우리는 당신을 바라본다오. 그리
고 당신은 우리들에게 당신의 빛을 뿜어내고 있소. 우리는 서로에게 잊혀질 수 없는 존재
들이오. 최소한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이상은."
어둠 속에서 네리아의 눈이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나는 혹시 반짝인 것은 그녀의 눈물
이 아닐까 따위의 생각은 관두기로 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자, 별들은 나에게 빛을 주었다.
제 10 장 : 약속된 휴식
"예…. 그래요. 그래서 유피넬은 저희들의 경우를 통해 알게 되었죠. 조화는 먼저 구별을
전제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스스로 절대로 다른 자와 같아질 수 없는 지성을
만드려고 했지요. 그것이 당신들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유피넬로 하여금 이율배반에 빠지게
만들었지요. 그는 조화의 유피넬. 다른 자와 항상 달라지려 하는 지성이라는 것은 그의
전체에 대한 부정. 재미있지요? 그래서 그는 헬카네스와 손을 합쳐 당신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요. 결과적으로 당신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자들과 같아지기를 거부하는,
그러나 항상 다른 자들에게 자신을 나눠주기를 바라는 지성이 되었어요. 유피넬과 헬카네스
양자의 관심을 받아서."
"축제를 앞둔 농부는 몇 배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된 휴식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다. 따라서 몇 배로 맹렬하게 살아갈 수
있다."
"휴식이 약속되어… 죽음이?"
"그렇지요.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지요."
"그럼 죽음이 축제라는 말이에요?"
"축제가 일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일상의 괴로움을 모두 잊고 자신마저도
잊을 수 있는 의미에서의 축제라면 죽음은 곧 축제인 셈이지요."
제 11 장 : 앞을 보지만 뒤를 생각한다
"하하. 그러니? 음. 앞을 보면서도 뒤에 따라오지도 않는 추적자를, 혹은 자신의 과거, 어제
의 실수 따위를 생각하면서 진구렁탕에 발을 빠트리는 사람이 있다면 넌 그 사람을 뭐라고
부를 거지?"
"바보…지?"
"그래. 바보는 마치 곰곰히 생각하기만 하면 지나간 실수가 바로잡아질 것처럼 믿지. 과거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 완전히 고정된 것인데 말이야."
"그럼 범부는?"
"범부도 어떤 의미에선 바보와 마찬가지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나간 실수를 생각해서 앞으
로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 범부, 보통사람일 뿐 이지. 하지만 범부라고 해봐야 결국은 그
사람도 과거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야. 바보든 범부든 과거라는 시간의 산물이지. 바
보는 그것에 매달리고, 보통 사람들은 그것에서 배운다는 점이 다를 뿐이지."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의 저 감춰진 시선을 느끼는 것은 퍽 유쾌한 일인걸? 두 사람은 모
두 안듣는 척하면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두 사람 모두 능숙한 거짓말쟁이나
사깃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 자신의 행동을 잘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키키키키. 레
니는 한참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그 풀려버린 표정 그대로 말했다.
"그럼… 현자는?"
"현자는 과거의 시간과 상관없는 존재가 현자야. 그는 현명하므로 과거를 굳이 생각하지 않
아도 미래를 깨달을 수 있지. 사실 이런 사람은 드물지. 핸드레이크나 그렇게 불릴 수 있을
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역사책을 읽지 않아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왜냐
하면… 그들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생각하니까. 여기서는 사실 '앞' 이라는 말과 '뒤'
라는 말이 다른 의미로 쓰이는 거야. 음, 그러니까 레니, 넌 지금 나의 앞을 보고 있지?"
제 12 장 : 불길한 예언
"예언은 미래에 대해 말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시점은 현재에요. 아무리 미래에 대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속한 것이라고요.
한마디로 믿으면 그만이고 믿지 못하면 안믿으면 그만이라는 말이지요. 미안한 말이지만,
좋은 일이라면 믿겠어요. 만족감은 있을 테니까. 만족감 하나 때문에 믿겠어요. 하지만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예언은 믿지 않겠어요. 뭐라 해도, 현재를 사는 것이니까."
짝사랑과 상사병은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짝사랑과 상사병은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프고 아프지요. 참 글러먹은 문제입니다. 짝사랑 을 하면 그냥 그 사랑을 소중히 여기면
될 문제인데 말입니다. 상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꼭 그것 때문에 슬퍼하
고 아파해야 된단 말입니다. 상대도 날 봐주었으면, 날 생각해주었으면, 날 사랑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고장이 나버리지요. 고약하다면 고약한
것이고, 동정하려고 들면 정말 동정받을 일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도, 도대체 무슨 말을…"
제레인트는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조금 꺾더니 다레니안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당신도 그 점에선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뭐라고?"
"사랑은 어쩌면 모든 종족에 있어서 마찬가지의 불길일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은 그가 변화
하기를 바랬을 겁니다. 맞습니까?"
"변화…?"
"만물을 사랑하는 핸드레이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사는 핸드레이크가 되기를 바랬을 겁니
다. 당신은 세계를 사랑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을겁니다. 사실 누가 그런 자
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당신은 제멋대로 그가 변화하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사랑이
라는 이름으로, 그가 그의 모습으로서 있게 허락하지 않고, 그를 파괴해서 재조립하려고
했을 겁니다. 맞습니까?"
다레니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창백한 얼굴로 제레인트를 마주볼 뿐
이었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은 그의 모습에 맞추어 당신의 사랑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맞추어 그
를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적어도, 내가 들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다레니안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그럼 네가 말하고 싶은, 진정한, 진정한 사랑은 뭐지?"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건 무관심하고 뭐가 다르다는 거지? 상대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라
면, 그건 무관심하고 뭐가 다르단 말이야!"
다레니안의 작은 몸 전체가 분노로 떨고 있었다. 하지만 제레인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두 가지는 구별하기 어렵겠지요. 나로선 확신은 없습니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인
지, 아니면 우리에게 무관심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핸
드레이크가 당신에게 무관심했는지, 아니면 자신을 마구 변화시키려드는 당신의 모습마저도
포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레인트는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핸드레이크는 드래곤 로드마저도 북방으로 쫓아버릴 정도의
남자였습니다. 그건 잘 아실 테지요. 직접 보셨으니까. 그런 자가 왜 시시콜콜 자신을 방해
하는 당신은 그대로 내 버려두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