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과 CLAMP를 다시 읽는 밤
'데미안'과 CLAMP를 다시 읽는 밤
- 둘의 마법, 2의 시절
중2, 두 세계가 충돌하고 해체되어 다시 만나던 밤들이었다.
92년 겨울, 노란 가로등 불빛과 하얀 눈과 책들과 편지지를 기억한다.
그 시절 각인이 되어 지워지지 않는 두 문장을 만났다.
카인의 표식처럼, 혹은 장갑 속 모리의 별 표지처럼.
그리고 오늘 밤 김연수 때문에, Big Issue의 찌질이 싱클레어에 대한 그의 글 때문에, 나 역시 다시 그 시절의 두 책을 펼쳐든다, 돌아본다, 만난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두 문장을재회하곤 두근댄다, 아린다, 글썽인다.
하나. [데미안] by 헤르만 헷세, 청림 출판
첫 챕터의 제목이 '두(개의) 세계'였다.첫챕터를 읽은그 날 밤 CLAMP의 세계를 만나게 해준 J에게 데미안의 첫 부분으로 가득 메워진 편지를 적어내렸다. 그리고 데미안의 쪽지는 읽은 순간 암기돼 버렸다. 아니, 암기가 되어버릴 만큼 수십, 수백 번 읽고 읽고 읽었던 게 더 바른 말일테다. 카인의 표식에 끌렸으며 에바 부인에게이끌림 당했다. 오늘 밤 눈길이 멈춘 문장은 그 에바 부인의 말들이다.
p. 193
"당신은 당신 자신이 믿고 있지 않은 소망에 몸을 맡기지 마세요. 나는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가를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소망을 포기할 수 있거나 또는 완전히 올바르게 소망해야 합니다. 그 소망이 자기 내부에서 확실히 이루어진다고 믿고 바란다면, 그것은 정말로 실현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소망을 하고는 또 다시 후회를 하고 공포를 느낍니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해야 해요."
p.195
그는 사랑했고 그 결과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둘. [도쿄 바빌론] by CLAMP, 대원
스바루는 내 이상향이었다. 싱클레어이자 데미안이기도 했고 상처받은 구세주이기도 했다. 기억한다, 눈 쌓인 마당에서 그를 상징하는 검은 장갑을 끼고 그처럼되고 싶어했던 어느 날을. 전 7권짜리 구판 대원의 도쿄바빌론 중 5권 마지막의 클라이막스, 세이시로가 스바루 대신 눈을 찔리는 부분에서 결말까지는 한 장면 장면이 명장면이라 다시 보며 또 울컥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슬픔들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하나 하나, 다르다. 그런데 또 슬프고 아프고 아리다는 점에서 닮았다. 이해할 수 없으나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p.75
똑같은 고통? '누군가와 똑같은' 고통따윈 존재하지 않아!! 사람들은 각자 다른 고민과 고통을 안고 있어. 그 중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건 없는 거야.
p.80
우리는 TV나 신문의 '뉴스'를 모두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그리고 대부분의 '뉴스'는 정확할 지도 몰라. 하지만 거기엔 가해자나, 피해자의 마음... 그 가족들의 심정까진 표현되어 있지 않아.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일어난 사건의 '현실'만을 알고... '사실'은 알 수가 없는거야. TV나 신문은 '전부'가 아니야. ...'모두'는 없는거야. 우리는 제각기 다른 사람이야.
p.113
서로 다른 인격체라는 걸 자각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 마음을 써준다는 건참 좋은 일이야. 그리고 너하고 내가 서로 다른 인격체라는 자각이 있어야만 마음을 써줄 수 있는거야.
p.146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모두 외로운 존재일지도 몰라. 오빠라면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왜냐면 오빠에겐 우리들처럼... 가슴 속 깊은 곳에 괴로움과 외로움이 있었거든."
두 작품을 보니 오카와 나나세는 데미안의 오마쥬로 도쿄바빌론을 쓴 건 아닐까 싶다. 적어도 상관관계가 있음은 분명한 듯 하다. '싱클레어, 데미안, 에바 부인'과 '스바루, 세이시로, 호쿠토'란 세 중심인물의 구도와 두 세계로의 나누어짐과 결합의 방식-싱클레어와 스바루의 변화양상-과 '표식'의 존재에 있어서. 또한 새 문장과 매의 운용면에서, 아프락싸스의 세계관도. 마지막 챕터의 타이틀도. ('끝의 시작'과 START)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두 작품을 읽은 내 정신세계에배 이상의 시너지로 영향을 미쳤을테지. 그래서 Stigma(흔적)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거야.
내게 영원한 흔적으로 남은, 남을 데미안과 CLAMP의 두 문장은 이렇다.
-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산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싸스다.
-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야. '상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행복해진 그 사람을 보고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은 자기만족 이외엔 아무 것도 아닌거지.
저 두 문장은 내 세계의 또 다른 한 축, 어둠의 세계.
(그리고 '어둠을 어둡게 하라'란 명령의 내 답이야.)
2011.05.21 토요일 밤에 종이에 쓰고, 2011.05.22 일요일 밤에 다시, 자판을 두드린다.
두 개의 세계, 두 개의 문장, 두 번의 두드림, 두 번의 적어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