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17-24
0.
제가 핸드폰을 사용하는 용도는 크게 3가지 입니다.
하나는 통화와 문자같은 전화 본연의 기능
하나는 아침 기상을 위한 알람
또 하나는 메모장
그래서 문자 메모가 끊임없이 추가되는 핸드폰으로 바꾸고 얼마나 기뻤는지.
근래의 메모들을 옮겨봅니다.
제 대부분의 글은 요즘에 빠져서 읽고 있는 글들의 작가인 파스칼 키냐르처럼 새벽에 잉태됩니다.
출근 길에 메모하기는기분 좋은 하루를 만드는 첫 걸음.
당신의 메모도 보고 싶습니다.
1.
좋은 시는 걸어야 나온다. 좋은 소설은 오래 앉아 있어야 나온다. 그러나 좋은 글은 앉아서 여행할 수 있는 자에게서 나온다. 이 여행의 지도가 있다면 메모다.
2.
P님의 리뷰는 관능적이다. 더불어 이 책 표지의 달싹이는 입술도 관능적이다 못해 매혹적이다. 이상이 파스칼 키냐르의 '혀끝에 맴도는 이름'을 읽게 된 이유다. 아, 뭐라 말해야 할까, 태고적부터 숨겨져 온 비밀을 발굴해 낸 맘이다. 읽고 나니 이 글은, 작가는 리뷰와 표지 그림보다 훨씬 더 관능적이고 매력적이고 섹시하다.
'아름다움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결별이다. 이 근본이 빛을 지니고 있다면, 결별 또한 빛을 지니고 있다. 11시의 빛.'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중
3.
어렸을 때 본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가 생각난다. 정신 병원 환자들이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약물 덕에 일시적으로 정상인처럼 돌아왔던 일화를 그린. 요즘 내가 그들 같다. 봄과 함께 글감들도 마구 피어오르고 생각과 감정이 끝없이 밀려오는데 그들처럼 언제 예전처럼 잠잠해질지 몰라 불안하다. 이 급격한 문학적 조증상태는 분명 멈출 것이고 그 전에 잠자리채 휘두르듯 글감을 낚고 써야지 싶은 맘에 조급증이 인다. 흔들리는 것은 오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꽃이 지듯, 파도가 잔잔해지듯, 폭풍우가 멎듯. 자연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갖고 있고 자연의 일부인 나 역시 항상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니 잠잠해지기 전에 이 소란스런 감상들을 면밀히 남겨야 한다. 평화를 가장한 일상이 침식해 들어올 때 다시 떠날 수 있는 방향을 짚어줄 수 있는 건 이런 약도 같은 글뿐이기에. M군의 말을 빌면 문학적 A형의 감성이 언제 다시 생물학적 O형으로 회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4.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란 말에서 '가는' 사람이란 표현에 주목해 본다. 친구는 내 슬픔을 등에 지고 멈춰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게 어떤 슬픔이던 꾸역꾸역 나아간다. 자신에게 그 짐을 지워준 친구와 함께. 만약 그가 내 슬픔 때문에 멈춰버린다면 내 슬픔이 더 커지리란 걸 배려한 덕이다. 그래서 서로의 짐을 지고 함께 걸어가는 게 친구이다. '지고'와 '간다'는 말은 마음과 행동이 함께 한다는 뜻이기에.
5.
나를 위해서뿐 아니라 나 때문에 십자가 못박히심을 알 것. 그 사랑의 크고 넓고 깊으심을 깨달으려면 먼저 내 죄의 크고 넓고 깊음을 알아야 한다. 내 죄만큼 밖에 그 사랑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도신경의 '본디오 빌라도'는 바로 나 자신. 그를 못박히게 한 것은 무리를 정의보다 우선시한, 세번 이상 묻지 못한 소극적인 모습밖에 보이지 못한, 용기 없는 바로 나인 것이다. 실은 본디오 빌라도가 그닥 큰 죄를 진건 아니라 생각했는데, -세번이나 되묻지 않았는가?- 그게 바로 옳지 않음과 타협하려 한 내 죄된 본성을 나타낸 건 아니었는지.
6.
'언니, 히라이켄 좋아하지요? 15주년 앨범을 주웠는데...' A사에 다니는 그녀는 종종 회사에서 책도, 음반도 주워온다. 어제 만난 그녀 덕에 부활절 아침을 히라이켄의 커플링 곡들과 함께 시작한다. 좋다! 기억해주는 그녀도, 챙김 받는 나도, 히라이켄의 노래들도, 부활절 아침도 모두. HAPPY EASTER!
덧.
머릿 속이 북적북적, 휴가철 도로 같습니다. ㅠㅠ 메모할 때는 쓱쓱인데 글로 엮어내려면 고역이지요. 약도 보고 길찾기 같다고 할까요, 제가 길치라, 근데 가끔 그렇게 찾아들어간 골목이 또 원래 가려던 길 보다 맘에 들기도 하고. 아무튼 여행이랑 많이 닮았어요, 글쓰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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