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로댕갤러리에 다녀왔습니다. [윤영석: 3.5차원의 영역]이 전시중이었습니다.
그룹 게시판에 걸려있는 전시회 소식에 구미가 당겨서 달초부터 가자고 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게으름을 떨쳐내고 방을 박차고 나왔지요. 혼자 가면 또 이상한데로 샐까봐-길치이기도 하고- 길을 아는 엄마를 모시고 다녀왔습니다. 렌티큘러라는 특이 소재로 전시를 해놓아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시물들이 다르게 보이는 게 신기했어요.혹은 관람자의 움직임을 따라 작품이 움직이는 듯이 보였지요. 눈의착시현상을 이용한 작품들이주였습니다.
그 작품들과 작품에 대한 설명들을 읽으면서 또 역시나 늘 그렇듯이 머릿속에서 근래에 보고 들은 것들이 떠오르면서 마구 링크현상을 일으키더군요. 전시실 입구쪽으로 들어가는 길 바로 앞엔네 개의 눈들이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렌티큘러란 소재가 그리 비싸지는 않은 듯 책받침 비슷하게 만든 샘플작품 같은 것이 리플릿과 같이 있어서데려온 눈 하나는 지금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처음에 그 4개의 눈이 제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길 때 신기하면서도 교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작품 제목도 [시시각각 (angle of time and visual)]. 시간에 따른 시각의 변화를 저리 잘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싶었지요. 그리고 입구로 들어가 본 첫 작품이 [따뜻한 가슴]. 어머니의 젖가슴을 형상화한 모습인데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투명한 젖가슴도 되고 붉은 빛이 감도는 유리잔이 되기도 하고.
------------------------------------------------------------------------
윤영석의 작품엔 인문학적 관점이 녹아 있다는 설명, 심리적 시간과 시간의 심리성이라는 말... 시각의 상대성을 그린 작품이라는 설명이 있었고. '시시각각'이라는 작품제목에공감하고'따뜻한 가슴'을 보고는 그 말들의 의미를알기 보다는느꼈다.끄덕였다. 온다 리쿠의 [역사의 시간]이 떠올랐다.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다들 자신이 만진 부분이 옳다고 여기고 토론하듯이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과연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100% 옳고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게 인간에게 존재할 수 있을까? 분명 이 관점에서는 그 사실이 맞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사실은 옳지 않은 게 되어버린다. 총체적 실체를 파악하는게 인간으로서 가능할까, 그렇지 않다면 겸허히 다른 이들의 말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한 건 아닐까?
기록된 순간부터 모든 게 거짓말이 되어버려. 사실이란 건 그걸 본 사람이랑 시간에 따라서 얼마든지 무궁무진하게 해석될 수 있어. by 온다 리쿠, [역사의 시간]
사람이 있어. 그 사람에겐 하나의 관점, 시각이 있어. 또 다른 사람에겐 또 다른 시각이 있고,... 그렇게 사람만큼 무한한 시각이 있고, 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은 변하고 시각은 바뀌고, 시간 그 자체도 사람과 시각을 퇴색시키고 변조시키지. 그렇게 사람과 시각과 시간이 연관관계를 갖고 만들어 가는 게 작게는 인생이고 넓고 크게는 역사란 것일까? 전날 소빅스에서 본 한겨레의 새 만화잡지 [팝툰] 창간호에서 본 단편이 연상됐어. 조주희라는 생소한 작가의 [시간회귀병]이라는 작품. 원래 이런 류의 만화잡지는내 취향이 아니지만 펄럭이다 만난 그의 작품은 뭔가 전류가 통하는 듯한 서글픔이 느껴졌달까. 제목 그대로 시간에 역행해 점점 어려져 사라져 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 지금 읽고 있는 책도 시간과 사람 시리즈 2번째 책인 기타무라 가오루의 [리셋]이고. 시간, 사람, 시각들이 마구 덤벼들고 있어. 난, 우린 어떤 시간에 던져져 있는 걸까, 어떤 관점을 가지고 그 시간 속의 사건들을 바라 보고 있는 걸까?
사이시옷과 같은 사람이되고 싶다고생각해 본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길 바래본다.단어와 단어 사이를 연결지어주는 'ㅅ'의 역할처럼 사람과 사람, 하나의 시각과 다른 시각, 시간의 틈을 메꿔주고 싶어진다.'설마, 너 같은 애가?'라고 검은 내가 배배 꼬인 말투로 시비를 걸어오지만, 난 사람 '人'이라는 방패를 들어올린다. 난 하나가 아니잖아. '1'이라면 못하겠지만 또 다른 '1'들이 나와 함께'人'을 만들어 주니까 그 힘으로 해낼 수 있어라고... '암, 그렇고 말고.'라고 마음으로 끄덕인다. 그래, 혼자가 아니야.
로댕 갤러리를 나가자 덕수궁에서 시작되어 남대문으로 향하는수문장 교대식 행렬을 우연히 만나 남대문까지 따라갔다. 두 수문장이 교대하며 만드는 수많은 의식 속에서'사람 人'을 만난다. 결국 혼자서는 이 세상도, 역사도 지키거나 만들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