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02-06
긴 연휴라 여행계획을 세울 법도 한데 다들 떠난다니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서 아무 계획도 안세우고 있었다. 신정에 못한 방청소나 해볼까, 못 본 책이나 볼까 했는데 막상 연휴의 시작인 화요일 저녁이 되니 아무 계획도 없으면 5일 내내 ABR(Absolute Bed Rest: 침상 절대 안정) 상태가 될거 같아 무서워졌다. (나는 그게 가능한 인간이다;; 인도 여행 중에도 12시간 정도 교통체증 상황에서 창문에 박치기 하며 잤다, 돌아와서는 24시간 풀 숙면도 해봤다;;) 싱가포르에서 연수 오신 A 샘이 롱 헐러데이의 플랜이 뭐냐길래, 별 계획 없다, 저스트 릴렉스, 5일간 방과 붙어 있는 생활을 할 거 같다니 엄청 웃으셔서 그러면 안되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해서 [사랑의 역사]에 잠깐 등장하는 자코메티를 좀 알아볼까 싶은 마음에때마침 덕수궁 미술관에서하는 피카소와 모던아트 전에 갈 계획을 하나 세웠다. 함께[사랑의 역사]를읽은,코타키나발루에 가려다 계획이 무산된 L을 꼬셔서 고궁안 미술관 기행을 하기로 했다.
저 인상적인 포스터 속푸른 눈의 여인이 우리를 덕수궁 문 앞에서 맞아주었다. 11시 도슨트 설명에 맞춰서 갔는데 방학이고 설이라 아이들이 우루루ㅡ 좀 웃겼던건피카소는 아이의 시각으로 사물을보고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을 하시는데 지나가던 아이 둘이 피카소의 그 입체적인앞, 뒤, 옆이 함께 그려진 사람을 보고는 '무서워;;'라고 말하며 지나갔다는 거. 피카소에 관한 영상물 중 현재를 포함하는 작품이 예술일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원래의 방문의도와 다르게 도슨트 분께서 자코메티 딱 앞까지만 설명을 해주셔서 자코메티는 조형 작품만 보고 어떤 부가 정보도 못 얻어서 아쉬었다.
설명을 듣고는 다시 1관에서 4관까지 자체 투어도 했다. 티켓에 있는 저 그림을 그렸던유파가 다리파였나 그랬는데 온통 아마존 밀림 분위기. 그래서 [달과 6펜스]가 떠오르더라는...전 전시물 중에서는 샤갈의 그림도 괜찮았지만 그 보다는 에밀 놀데의 푸른 빛과 후안 미로의파랑색이 좋았다. 하나는 몽환적이고 흐릿한 기운이고 하나는 선명한 파랑인데도. 아무래도 난 파랑편애모드의 눈을 갖고 있나보다. L은 'OK' 싸인이 인상적인 오스카 로코모코(?)의 다양한 색감이 좋다고 했다. 그래서 2층에서 에밀 놀데랑 OK의 화보집도 들춰봤다. 그리고 의외인건 늘 직선과 원색으로 미술책에서 묘사되던 칸딘스키의 작품이 노년에는 상당히 어룽진 느낌이었던 것. 팜플렛에도 있는데 후기의 이 작품이 훨씬 더 따뜻하고 맘에 들었다. 역시 난 두리뭉실파!
점심 경이 되어 미술관에서 나왔다. 티켓 구입비에 포함된 덕수궁 입장료 만큼은 덕수궁에 체류(?)해야 않겠냐는 생각에 둘이 덕수궁 앞마당(?) 벤치에 귤 하나씩을 들고 잠시 앉아 풍경을 보며 미술 감상평을 나눴다.입장전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는데 역시 연휴라 그새 사람들이 곳곳에 보였다. 날도 많이 풀리고 볕도 나서 바깥 바람 쐬는 기분이 괜찮았다. 사람들 속에서 산책하는 비둘기 뒷모습도 찍어 주고.
귤이 먹고 싶었는지, 자기도 찍어 달란 건지 앉아 있던 벤치 바로 앞 눈밭으로 푸덕이며 사뿐이 내려 앉길래 이 아이도 찍어주었다. 볕은 좋았지만 아직은 겨울인지라 밖에 있었더니 따수운게 먹고 싶어서 급 삼청동 수제비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호도 하나도 안들은 호도과자 한 봉지 들고 덕수궁 앞에서 삼청동으로 가는 마을 버스를 탔다.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려 맛난 점심을 먹고 어슬렁 어슬렁 촌 사람 모드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정독도서관이랑 아트 선재를 거쳐 평상시에는 잘 안가는 언덕길 쪽으로 접어드니 왠 커피집이 보이더라는... L이 한 번 들어가보자는 말에 따라 들어갔다.
커피 향도 좋고 빛도 잘들고 조명이랑, 데코랑, 잡지가 맘에 드는, 또 가격도 저렴한 괜찮은 곳이었다. 물론 우리가 제일로 좋아라 하는 커피 위의 라떼 크림이 부드럽고 맛났다.
옛날 영화에나 나올 법한 TV와 흔들리는 집이 그려진 그림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잡지를 뒤적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1박2일을 즐겨보는 L의 제안에 따라북촌8경을탐색하는 걸 이후 일정으로 잡았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 쪽에 8경의 위치를 그려놓은 지도가 있어서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 그 지도를 따라 8곳을 찾아 헤메며 북촌의 이곳 저곳을들쑤시고 다녔다. 완전 서울씨티투어 나온 외국인 꼴이었다. 그런데 혼자서 카메라 들고 우리와 같은 루트를 걷는 사람들이 꽤나 눈에 띄었다. 2경이 공방길이 었는데 도대체 그 곳은 포토존 위에 서서도 왜 경치가 좋다는 건지 이해가 안됐고, 분명 약도대로 간 거 같은데 빙글빙글 돌다 보니 4경에서 어느새 5~8경을 건너뛰고 안국동 골목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이 날 밤 TV에서 재방송한 1박 2일 북촌8경편을 보니 우리가4경이라 생각한 곳이 6경인 것도 같고 도대체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1경인 창덕궁은 정말 멋졌고,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빛과 한옥의 지붕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이 날 본 미술품의 푸른빛보다 더 멋졌다. 역시 자연이 최고의 예술품.
어느새 해도 지고 저녁이 되어 서울에 살지만 서울나들이 한 번 제대로 못해 서울지리를 모르는 우리는 나머지 풍경을 포기하고 설 떡을 뽑는 떡볶이 집에서 오뎅과 떡볶이를 먹으며 나머지 '경'들을 다음 기회에 찾을 것을 기약했다. 참, 돌아가는 마을버스 타는 길 뒷쪽 경복궁에는 '입춘대길 건양대경'이 씌여있었다. 연휴 중에 입춘이 지난 걸 이제야 글을 쓰며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하루에 덕수궁, 창덕궁, 경복궁을 투어했네. 연휴 첫날은 서울 씨티 투어의 날.
두번째 계획은 설 연휴 기간에 해주는 TV영화보기였다. 오랫만에 어렸을 적 하던 양으로신문속TV프로그램 편성표를 보고 볼 영화를 미리 물색해놨다.수요일 [시라노...], 목요일 [하모니], 금요일 [킹콩을 들다], 토요일 [정의란 무엇인가]. 영화도 한편쯤 볼까 싶어 삼청동 갔을 때 아트선재에 들러서 NEXT에 있는 영화 목록을 봤는데 그닥 끌리는게 없어서 보류.W가 추천해준 [엘 씨크레토]는 보려고 하니 게으름을 피워서 시간이이미 지나서 포기. 일년전에 구워달라고 해서 받은 [아이앰 샘]과 [썸머 워즈]는 컴퓨터 켜기 귀찮아서 또 실패. 연휴 기간 중 이 때쯤 방청소를 해줬어야하는데 실은 맘 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연휴 중 방청소는 물건너 갔음;설 당일은 세배하고 고모가족 오셔서 수다 떨고 TV 보다 졸면서 노래 들으면서 책읽다 계획한 영화볼 시간돼서 영화보니 시간이 훌렁 지나가 버렸다. 설 영화 중 제일 재밌었던 건 [시라노...]. '믿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서 믿는다.'는 말이 좋았다.
세번째 계획은 못 읽은 책 읽기였다. 작년에 읽다만 [좀비들]을 읽고 의정에서 빌린 [리아의 나라]를 읽고 허니비엔나의 [스눕]을 읽고 시간나면 다른 책들도 좀 뒤적여 보기로 했다. 어쩌다 보니 금요일이 Reading Day가 됐다. 금요일은 오전에 TV영화를 보고 나가려고 했는데 몸도 안좋고 날도 꾸물거려서 결국 ABR 상태로 책을 내리 읽다 잠들었다. 역시 누군가와 약속을 안하거나 아무도 집에 안오면 방바닥 귀신이 되는 건 시간 문제. [좀비들]과 [리아의 나라] 두 권을 내리 읽다보니 엄마의 사랑이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아닌, 살아 있다고 보기 힘든 상황인 좀비와 식물인간을 자신의 목숨과 전 생만큼 귀히 여기는 모습이라니. 애절하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고 위대하기도, 처절하기도 했다. 그리고 추억은, 기억은 대단하다. 죽은 듯한 것도 살아있음과 다름없이 여기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니까. 픽션이던 논픽션이던 엄마 혹은 부모에 대해 묘사되는 모습을 보면 절대로 난 그런 모습이 될 수 없을거 같단 생각밖에 안든다.
네번째 계획은 I목사님께 인사드리러 가기였다. 일년에 2-3차례 예전에 함께 청년부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른 곳에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을 만나러 가곤 하는데 이번에는 긴 구정 연휴 기간 중에 토요일에 만나기로 선약이 되어 있었다. 늘 그렇듯이 12시에 목사님댁에서 만나기로 해놓곤 12시도 넘어 역에서 만나버렸다. 이젠 목사님도 그러려니 하시지만 죄송하긴 하다;; 미안한 맘에 빨리 가야하는데 먹을 건 사가야지 싶은 맘에 도넛을 사들고 가니 12시 30분도 넘어서 댁에도착. K언니는 커피 마시고픈 것도 꾹 참고 목사님표 커피를 마시길 고대했다고 하니 목사님께서 커피를 내려주신다. 목사님께서 말씀과 함께 커피를 전하신 관계로(?) 개척하신 교회 작년 회계결산에 커피값만 몇십만원이 나왔단다;; 어쨌든 커피맛 잘 모르는 난 쓴 숭늉맛을 음미하며 마셨다. 그 주 교회청소 당번인 조가 미리 와 있어서 같이 수다 떨며 사온 도넛과 커피를 마시다 우리와 목사님 부부는 따로 떨어져점심을 먹으러 갔다. 화제는 어쩌다 보니 이제 대학에 들어가게 된 첫 딸의 진로 얘기와 설날에도 선을 본 우리친구 K양의 얘기에서 시작된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야기. 식당에서 밥 다 먹고도 한참 얘기하다 다시 교회로 돌아와 담요 펴놓고 새로운 종류의 커피를 내려주셔서 마시며 커피와 등산과 제주도와 여행과 기타 등등의 이야기를 하다보니 그새 또 저녁 때가 돼 버렸다. 배웅 나오신 목사님과 근처 서점에 들러 허니비엔나의 2월 책인 [스눕]을 결국은 사고 말았다. 그닥 사고 싶지는 않았는데 의정에서 빌리려니 예약대기 11번째고 주변에 이 책 가진 사람은 없고 2월 모임날짜가 곧이라 시간이 촉박했고 대신 다른 책을 목사님 서재에서 빌려읽는 걸로 위안을 삼았다. 여기저기서 언급된 허수경 시인의 책을 들척이다 특별판이 꼭 화보집 크기라 정이 안가서 후루룩 훑어보는새 목사님께서는 사서 읽은 첫 시집이라며 그 때랑 표지가 똑같다는 류시화 시인의 시집을 보고 계셨다.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딱히 읽을 책이 없어 [스눕]을 펴들었는데 별로 읽고싶은 맘은 없는데 이상하게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기 현상을 겪었다. 돌아와서 EBS의 [정의...] 마지막 세편을몰아서 봤다. 공동체를 통해 나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 속의 나란 뜻의 '서사적 자아'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정의와 선의는 함께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지만 선의의 범주를 어디까지 펼쳐야 정의가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또 도덕경인가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는데 친구와 타인을 똑같이 선으로 대하는게 옳다고 생각하며 그리 행하는 성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친구가 없을거라는 말이 충격이었다. 혹시 이게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잘 만들지 못하는 이유인지도 몰랐다. 내가 성인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편애하는건 꽤나 지양하려는 편이기에. 공동체에 대한 의무에서 그 범주와 한계에 대해 좀 더 생각해서 정리해 보고 싶다. 나중에 I 목사님께 [정의란 무엇인가] 빌려보면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주일, 연휴 마지막이라 아쉬워라 하는 맘을 아는지 오후예배가 따로없고가정예배로 드리는 날이다. 그러나 가정예배 드리는 분들이 얼마나 계신지는 미지수?어쨌든유년부 예배랑 교사회의 이후로는 FREE~!아빠가 생일선물 사라고 주신 돈과 할머니가 주신 세뱃돈으로 가방을 살까 싶은 맘에내 스타일리스트 겸 결혼보내기 준비위원장을 자처하는 S양을 꼬셔서 명동에 가기로 했다. 가기전 그녀의 스타일링에 따라 최근 바뀐 눈썹과 머리컷을 그녀의상콤한 귀마개를 빌려 쓰고담아봤다.
명동에 가기전 숙대근처 핀볼(핀홀인가? 기억력 감퇴를 겪고 있는 삼십대. ㅠ_ㅠ)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여기도 분위기 좋고 싼편. 테이크 아웃 아메리카노는 천원밖에 안한다. 마침 사람이 적어 이층 다락에 올라가서 마실 수 있었다. 내가 마신 코코넛 라떼는 달고나의 달콤 쌈싸름한 맛이 났다. 커피잔 뒤집어 놓은 듯한 등이신기해서 찍어 봤다.불빛 톤이 맘에 든다.
주문하면 우측 주방에서 저 비어 있는 살 사이로 커피를 받침에 받혀 올려준다. ㅎㅎ 위에서 내려보는 풍광도 괜찮다. 안찍혀진 저 편에는 따로 룸 같은 오두막도 있다. 아마 그 자리가 다락 다음으로 인기가 좋지 않을까 싶다. 우리 바로 아래 제일 많은 인원수용이 가능한 곳에는 S교회 셀모임으로 추정되는 젊은이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사진 한 켠에 보이는 저 가방, 몇 개월부터 바꾸려고 맘 먹고 있는데 도대체가 맘에 드는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명동서 반짝이는 에나멜 숄더백을 찾아 헤매다 포기하고 닭꼬치만 먹고 눈요기만 하다 돌아왔다. 인터넷으로 가방을 뒤져보아도 100%맘에 드는 건 없고. S양 말마따나 내가 직접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ㅠ_ㅠ
아, 역시 아쉬운 몇 프로 부족한 연휴의 마지막 날, 벌써 새로운 월요일이 시작됐구나아.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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